독서감상문 : 소모되는 남자
이 책은 읽기가 매우 수월했습니다. 내용이 쉽다거나 재밌어서가 아닙니다. 두 번 읽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책을 두 번 읽은 것은 아니고요. 나무위키에 누군가 이 책의 내용을 굉장히 상세히 정리해 놓은 것을 읽었습니다. 그 덕분에 책을 구입하기도 전에 책 전반의 대략적인 내용을 선행학습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책을 읽으니 훨씬 기억도 잘 나고 이해도 쉽더군요. 혹시 관심 있으시면 나무위키 ‘소모되는 남자’ 페이지를 읽어 보세요.
제목만 언뜻 봐서는 페미니즘을 반박하고 남자의 인생도 쉽지 않다고 주장하는 책으로 보입니다. 사실 그런 내용이 맞습니다. 이 책은 페미니즘을 비판합니다. 정확하게는 미국의 페미니즘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남자의 삶이 고달프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내용이 남자 편에 서서 푸념하는 것에 불과했다면 제가 이걸 사지 않았겠지요. 저는 젠더갈등에 뛰어들어 전쟁에 참여하기보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관조하는 것이 더 좋으니까요.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이것이 젠더갈등을 진화생물학적 개념에 근거하여 관조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논리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배운 자연 선택의 논리에 매우 부합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기적 유전자론의 열렬한 신봉자 중의 하나입니다. 문화가 남성과 여성에게 부과하는 성 역할이, 문화의 생존 및 경쟁과 깊게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은 굉장히 흥미를 당기는 주제였습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내용은 ≪이기적 유전자≫를 이해하지 못 하신 분께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서울대 권장도서 중 하나니까 지금 바로 구입하셔서 읽어보세요!
너무 경도되지는 말자
내용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주의를 당부드립니다. 이기적 유전자론은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프레임워크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이며 내 주변 모든 사물과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진리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이기적 유전자론은 현실세계를 극도로 단순화한 이론에 불과하며, 이론을 현실에 적용했을 때 그것이 타당한지를 판단하는 것은 지식인인 저희들의 몫입니다. 환원주의와 결정론에 너무 빠져들지 않도록 다들 조심하도록 합시다.
경쟁하는 문화들
문명 시뮬레이션을 수행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Be 폭력주의자 간디가 나오는 그 게임 말고요.) 처음에는 다양한 특징을 가진 문화(사회)를 몇 개 생성합니다. 어떤 문화는 스파르타처럼 구성원 전체를 군인으로 기르는 데 총력을 기울일 수도 있고요. 또 어떤 문화는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처럼 상업과 예술을 중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문화는 농경 문화, 또는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는 문화, 또는 모계 문화이거나 부계 문화 등등.
자 이제 시간이 흐르도록 재생 버튼을 누릅니다. 각각의 문명은 자신의 위치에서 자원을 채집하고 식량 생산을 늘리고 인구를 늘려 영토를 확장시켜 나갈 것입니다. 영토를 확장시키다 어떤 두 문화가 맞닥뜨린다면, 전쟁을 하거나 평화 조약을 채결하거나 하겠죠? 어찌됐건 둘이 만나면 경쟁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자 여기서, 스파르타 문화와 피렌체 문화가 만나 경쟁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스파르타는 다른 문화와 싸워서 이기기 위해 열심히 칼을 갈고 닦았지만,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피렌체에 패배하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스파르타는 피렌체 문화의 지배를 받거나 합병되겠죠?
여기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스파르타 문화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까요? 당연히, 다음번에 싸울 때는 승리하기 위해서 자신을 이긴 문화의 특성을 모방하려 들겠죠? 혹은, 피렌체에 의해 지배당하며 자신의 문화가 제거되고 피렌체의 문화를 강제로 받아들이게 되겠죠.
이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던 다른 문화들은 어떻게 느낄까요? 자신이 스파르타처럼 정복당하지 않으려면, 재빨리 피렌체의 노하우를 배워서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들은 피렌체로부터 사법·행정 체계를 배워오려 할 것이고, 배를 짓고 상업을 시작하려 할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 여러 개의 문화가 존재할 때, 각 문화는 생존하기 위해서 가장 경쟁력 있는 문화가 가진 특성, 최적의 특성 모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가장 훌륭한 문화를 나머지가 베끼는 과정을 수천 년 반복하고 나면, 문화들끼리의 동질성이 상당히 올라가겠죠. 문화의 생존과 별 관련이 없는 특성은 각 문화별로 자유롭고 다채롭게 공존하겠지만, 너무나 훌륭해서 이 특성을 보유하지 않은 문화들이 도태된다 싶으면 모든 문화가 그 특성을 보유하고 있겠죠.
최적의 특성
생각해 봅시다. 대부분의 경쟁력 있는 국가의 군대는 병사들의 성욕 분출을 억압합니다. 각 국가의 군통수권자들이 UN에 모여서 병사들의 성욕을 억합하자고 합의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병사들의 성욕을 억제한 군대는 전투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고, 병사의 성욕을 억제하는 문화가 그렇지 않은 문화를 없애는 과정이 수천 년 동안 일어나, 병사의 성욕을 억제하지 않는 문화는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단 안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어떤 특성은, 그것이 너무나 우월한 탓에 나머지 특성은 싹 멸종하여 그것만 남은 것이다. 이것은 제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전세계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성은 그것이 압도적으로 우월한 전략이라고 유추할 수 있겠습니다.
즉 군인의 성욕을 업압하는 것은 압도적으로 우월한, 최적의 전략이 되겠습니다. 그 외에도 다른 예시가 많이 있습니다. 가부장제, 일부일처제,
문화는 생존을 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습니다. 물론 문화의 구성원들 중 외교부나 국방부에 속한 사람들은 문화의 생존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만. 문화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긴 기간 동안 자연선택을 거치며, 가장 인구를 효과적으로 늘리고 적대 문화를 잘 제거한 문화만이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문화가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화는 죽고싶지 않다는 목표를 위해 가부장제를 만들고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만들었으며, 남성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 행동하는 문화가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남자는 돈을 벌고 여자는 집안일을 한다. 전쟁이 나면 남자는 총을 들고 싸우고 여자는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길 기다린다. 이런 고정된 성역할은 오늘날 굉장히 고리타분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자들이 여자를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억압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 문화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특성이었기 때문에 자연 선택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물론 권력을 잡은 남성들의 오만과 욕심이 이 체제를 견고히 하는데 일조하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고 약자가 더 큰 조명을 받는 현대사회로 오면서 가부장제는 철저히 해체되었습니다. 지난 남성 중심의 사회를 개혁하여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데 성공한 문화는 현대에 크게 번창하여 소위 말하는 선진국 그룹을 이루었습니다. 결국 남성의 욕심과 오만보다는 자연의 선택 압력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총평
저는 책의 내용들 중 이기적 유전자론과 연관된 부분을 중점으로 이야기했습니다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저자는 책의 제목에 맞게 남자로 태어나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가령, 타이타닉이 침몰할 때 귀족 남성들은 평민 여성들을 위해 구명보트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등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나 여자보다는 남자가 죽어야 한다는 점이 있고요. 군인, 빌딩 외벽 청소부, 광부 등 위험한 직업은 언제나 남자가 하게 된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의 상류층에 있는 남자들만 보면서 성별 불평등을 토로하지만, 사회 밑바닥에도 남자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한다는 점 등.
그런데 재밌는 것은, 책의 논조는 남자들이 고생을 많이 하니 남자들의 인생을 편하게 만드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남자들은 임신을 하지 않으며 여성을 임신시킬 수 있다는 그 입장 때문에, 남자들을 위험한 일에 투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효과적이라는 것은, 문화가 생존하고 다른 문화를 정복할 힘을 늘려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역시 위험한 일은 당연히 남자가 하는 게 맞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ㅋㅋ
여성은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도 아기는 1년에 한 명만 낳을 수 있지만, 남자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면 아기를 엄청 많이 만들 수 있다. 모든 것은 이 중대한 차이점에서 시작합니다. 남자가 더 소모적인 일에 투입하기 적합하고, 남자가 더 리스크를 감수하고 여자는 리스크를 회피하며, 남자가 리스크를 더 많이 감수하기 때문에 사회의 상류측과 하류층에 모두 남자가 많이 분포하며, 이로 인해 남자와 여자는 동일한 수준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수준의 성과를 낸다는 사실이 도출됩니다. 책에서 하는 주장입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책을 직접 읽어 보시거나 위에서 알려드린 나무위키 글을 읽으면 좋을 것 같네요.
슈카월드에 영상이 하나 올라왔죠. 한국 사회의 갈등은 너무나 극심해서 선진국 안에서 1위를 다툰다고 하네요. 이 갈등은 전시 수준으로 낮은 출산율이라는 큰 재앙을 이미 몰고 왔습니다. 사랑하기만으로도 바쁜 20대 청춘을 혐오와 싸움으로 허망하게 날려버리면 그것은 결국 너와 나 모두의 손해일 뿐입니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남자는 왜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가? 여자는 왜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가? 이 불합리한 대우를 만들어낸 것은 상대방인가 아니면 자연의 법칙인가? 이것을 자세히 살펴봐야만 단단히 꼬인 갈등의 실타래를 풀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지요.
저는 관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남자의 이익을 대변할 생각이 없습니다. 오직 현실을 추상화하여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오직 어떻게 해야 행복의 총량이 증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국에서는 어느 정도 환원주의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